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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화 연습 1. >  2025~ 2026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의 언어를 시각적 형태로 드러내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고정된 의미에 갇힌 언어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을 탐색하고, 일상에서 끝내 말하지 못한 채 삼켜버린 말들에 표정과 형상을 부여한다.
 
말을 건넨다는 것은 감정을 밖으로 꺼내는 일인 동시에, 그 말이 타인에게 남길 흔적을 감수하는 일이다. 발화된 말은 화자의 의도를 벗어나 타인의 기억과 감정 속에서 다른 의미를 얻으며, 때로는 처음의 온도와 형태를 잃은 채 낯선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한 번 건네진 말을 더 이상 온전히 소유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는 감각은 말하기 이전의 망설임을 길게 만든다. 그렇게 삼켜진 말들은 사라지지 않고 기억 안에 남아 또 다른 감정의 층으로 쌓여간다.
 
떠도는 파편과 얽혀 매달린 구조, 그 안에서 빠져나오려는 형상들은 서로 다른 질감과 두께로 중첩된다. 이들은 언어의 껍질과 속살 사이에 잠복한 감정으로부터 비롯된다. 어떤 것은 붙잡히고, 어떤 것은 흘러가며, 또 어떤 것은 경계에서 부유하거나 침잠한 채 머문다. 안정된 구조처럼 보이는 장면도 작은 움직임에 쉽게 무너질 수 있고, 흐릿한 배경 속에서 오히려 선명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붙잡힘과 이탈, 부유와 침잠이 교차하는 풍경은 감정을 다루는 방식과 관계 안에서 반복되는 긴장을 은유한다.
 
말이 되기 이전의 감각과 말이 지나간 뒤의 잔여 사이에서, 작품은 쉽게 결론 내릴 수 없는 상태를 오래 바라보게 하는 장소가 된다. 화면에 남은 형상은 하나의 뜻을 설명하는 기호가 아니라, 침묵 속에 보류된 감정이 잠정적으로 얻은 형태다.
 
침묵을 형상으로 옮기는 순간, 그것은 이미 또 다른 발화가 된다. 말 대신 선택한 이미지와 구조 역시 누군가에게 닿으려는 움직임이다. 따라서 〈발화 연습〉은 완성을 향한 연습이라기보다, 말함과 침묵함 사이를 반복해서 통과하며 타인과의 거리와 속도를 가늠하는 과정이다.
 
이 작업은 삼켜진 말을 하나의 의미로 복원하려 하지 않는다. 말이 되지 못한 감정이 어떤 형태로 남아 있는지, 그것이 서로 다른 형상과 관계 속에서 어떻게 다시 움직이는지를 화면 안에서 살핀다.
 
작품 속 파편과 구조는 관람자의 기억과 감각 안에서 다시 이어지거나 어긋난다. 그 사이에서 각자의 말과 침묵은 아직 끝나지 않은 풍경으로 남는다.


대화의 풍경_ 그 어딘가에
어계원갤러리 2023. 10. 31 ~ 11. 5

방대한 디지털 이미지와 정보가 넘쳐나는 오늘날,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는 풍경은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의 구분만큼이나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며 서로 다른 온기로 생성된 새로운 풍경들로 축적되고 있다.
 
이전 “삼켜진 말”과 “껍데기”라는 작업을 통해 형언하기 모호한 감정적 언어를 시각 형태로 가시화하고 “삼켜진 나라”라는 가상의 공간을 통해 (고정적 인식에 갇혀있는) 언어의 자유를 모색하며 작업을 담아내었는데 팬데믹 이후 더욱 진해진 디지털기기를 통한 새로운 관계 맺기 방식의 양상들을 바라보며 일상적 언어의 풍경 또한 변화가 찾아왔음을 인지하고 새로운 대화의 풍경들을 채집하여 회화를 통해 고찰하고자 한다.
 
작업에는 실존적 대화 풍경과 인공적 대화 풍경이 뒤섞여 분열적이면서 텁텁하고 가볍고 속이 텅 빈, 여러 관점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화면에는 일상적 사물과 무관해 보이는 디지털 존재들이 만나 생경한 풍경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신작의 제목처럼 특수문자가 작업의 명령코드가 되어 시간에 따른 감정변화의 폭을 추측할 수 있는 힌트로 쓰이거나, 대화의 풍경 속 변주 요소로 활용되어 나타내고자 하는 풍경의 시각적 확장과 앞으로의 작업 방향성을 담아내기도 했다.
 
긴 시간이 소요되는 것을 꺼리는 현시대의 사람들은 릴스나 쇼츠 같은 단시간에 자극을 얻을 수 있는 숏폼을 선호하고 가벼운 대화나 관계를 선택하여 감정 소비를 줄이려는 현상이 깊어지고 있다. 개인주의적 성향 또한 심해져 어긋나는 소통이 부지기수가 되었다. 인공적인 소통의 현장에서도 분명 수집하고자 하는 시각적 언어들은 끊임없이 생성되겠지만 작업을 떠나 인간이 가진 내면의 감정 요소들이 궁극적으로 쇠퇴하거나 소멸하지 않는 미래가 있길 바란다.


“눈알을 던져라”
갤러리 밈 2022. 4. 27 – 5. 15, 1전시장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미지의 뒷면이다.
현실에서 만지고 느끼고 관찰할 수 있는 실제 정물과 풍경 이미지가 아닌 전자기기 속 불특정 다수가 얄팍하게 가공해 올린 이미지의 뒷면이다.
그저 보이지 않는 뒷면을 재현하려는 것은 아니고 이미지의 앞과 뒷면을 한 면에 펼쳐 볼 수 있는 방식을 택하여 작업하였다.
이전 작업에서 볼 수 있듯 나의 관심사는 일상생활에서 발설하지 못한 말들의 이면이나 타인과의 소통 중 어긋남이 생기는 순간을 시각화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팬데믹으로 인한 건강상의 문제로 밖을 전혀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 생겼고 제한된 공간 안에서 타인과 만남이나 직접적인 감정 교류 및 소통이 불가능해지다 보니, 시선이 자연스럽게 스마트폰 상의 광범위한 이미지로 향하게 되었다. 아니, 볼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었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 같다. 이미 전자 이미지에 관련된 작업을 하는 작가는 너무나도 많기에 굳이 나까지 관심 두지 않아도 될 자리처럼 느껴졌었는데 지금은 그 얄팍한 가공의 이미지가 유일하게 내게 주어진 작업의 대상이 되다니 아이러니하다.
 
일상의 무너짐과 커다란 상실감은 팬데믹 이전의 삶 때도 느껴왔던 것이기에 이러한 환경의 변화가 큰 충격으로 다가오진 않았지만, 사람과의 감정, 교감 장치의 부재는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기에 그 부분이 감정을 요동치게 했다.
어쩌면 가공된 이미지의 뒷면을 펼쳐보고 싶은 마음은 교류의 부재에서 오는 적막함에 대한 실소이며 자유를 향한 소망과 반대로 허무함을 감추기 위한 발악일 수도 있다.
 
 
 
[ 어느 날 내가 사는 곳 주변에 상자 하나가 떨어졌다.
그 상자에는 작은 구멍 두 개가 뚫려있었고 사람의 인기척도 느껴졌다.
궁금해서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
말소리만 안 날 뿐이지 상자 속에는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뚫려있는 구멍으로 눈동자가 비쳤기 때문이다.
상자를 자세히 살펴보니 ‘주의사항: 이 상자는 수상한 물체가 아니 오니 신고하지 마시오.’라고 적혀있었다.
수상해 보이는데 수상한 물체가 아니라니?
상자 안의 정체 모를 그는 동의하에 갇혀 지내는 건가? 퍼포먼스 같은 예술 활동인가?
궁금증이 쏟아지려는 찰나 뭐가 됐든 내 일도 아니고 관여하면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우선은 지나가지만 신고하지 말라는 그 단어가 어딘지 찝찝해 눈을 찡그린 채 발걸음을 옮겼다.
 
상자 속 그가 말을 못 하는 건지 일부러 안 하려는 것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가끔 구멍 밖으로 흘려보내는 텍스트로만 안부를 확인할 뿐이다. 상자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인지 궁금했던 사람들은 호기심에 우르르 몰려와 관음한다. 그러나 별달리 얻어 갈 이슈가 없다는 것을 알 곤 순식간에 다시 흩어진다.
 
시간은 흘러 그 상자를 발견한 지도 벌써 햇수로 2년을 훌쩍 넘겼다.
그는 나가려는 의지도 용기도 없는 것인지 여전히 상자 속 뚫려있는 구멍에만 의지해 밖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을까? 그가 보는 풍경은 어떤 풍경일까? 답답하진 않을까? 변화를 꿈꾸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그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려는 찰나 그가 나를 불러 세웠다.
처음 들어보는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으나 다음 말이 궁금해 발걸음을 재촉하여 상자 가까이에 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눈알을 저기로 던지고 싶어 도와줄 수 있니?”
“네? 눈알을요? 눈알을 뽑으면 아무것도 못 보게 되잖아요. 당신이 이 상자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자유는 구멍을 통해 밖을 보는 것이 아니었나요?”
어이없고 끔찍한 부탁에 몇 분 동안 현실적인 설득을 해봤지만, 그는 눈알을 뽑지 않으면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간곡하게 부탁했다.
내 손으로 그의 눈알을 만지고 싶진 않아 대신해 줄 다른 이가 있나 난감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런 이는커녕 평소엔 자주 보이던 길고양이의 꼬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 그래! 까짓것 불쌍해 보이는 사람 도와주는 셈 치고 한번 해보자. 순식간에 던져버리자. 뒤에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상자 속 그는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순식간에 뽑은 눈알을 건네주었고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촉감에 나는 비명을 지르며 눈알을 저 멀리 던졌다.
그의 눈알은 허공중에 나선형을 그리며 바로 확인하기 어려운 꽤 먼 곳에 떨어졌다.
격앙된 목소리로 “이제 됐나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실 거예요?” 물음과 함께 뒤를 돌아보니 상자는 보이지 않았고 그곳엔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

-2021년 2월 17일에 꾼 꿈을 기록한 노트에서 발췌



[2019. 10.05~27. "기울어진 숨", 탈영역 우정국 전시 작업노트]



“어머니의 얼굴이 빨갛다. 어머니가 삼킨 말도 빨갛다.
아버지의 등이 휘었다. 아버지가 삼킨 말도 휘었다.
오빠의 손이 차갑다. 오빠가 삼킨 말도 차갑다.
동생이 숟가락을 던졌다. 동생이 삼킨 말이 나뒹굴었다.”

나는 일상생활에서 발설하지 못하고 삼켜버린 말들에 표정을 담아 그리고 있다.
언어가 형태가 있거나 만질 수 있는 시각적, 촉각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그것이 내포한 뜻만으로도 심리적 유추가 가능하다. 언어는 기억을 소환해 정신과 몸이 반응케 한다.
삼켜진 말은 언어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입안에서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무형의 존재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혼과 같은 결이다.
삼켜진 말들은 시시각각 여러 형태로 변화한다. 시선에 따라 장소도 내용도 표정도 바뀔 수 있으며, 수면 아래의 기억까지 환기시켜 경험, 상황, 분위기 등에 맞춰 유동적인 형상을 만들어 낸다.

이번 전시에는 “일상생활에 삼켜진 가족 간의 말”에 대한 작업을 보여주고자 한다.
개개인의 환경이나 성격마다 조금씩 차이는 존재하지만, 사람의 성격과 인생은 가정환경에 따라 큰 영향을 받는다. 이는 자신의 선택이 아닌 태어날 때부터 운명적 혹은 타의적으로 정해진다.
보편적인 한국의 가족 형태로 봤을 때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말을 삼키는 모습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정해진 권력 앞에 강하게 맞설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이 아닌 가족일 경우에는 작은 반항만이 최후의 수단이 된다.
부부가 되었지만 남편은 남의 편인지 내 편인지, 아내도 아~ 내편인지 네편이지, 인생의 3분의 1을 서로 모르고 살다가 인생의 나머지를 서로 알며 살아야 하는 환경에서 수 많은 일들과 감정이 맞닿게 된다. 아이가 생기면 아이는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다양한 감정의 증폭제 역할을 하게 된다.
형제자매가 있는 가정은 어릴 때부터 은밀한 권력 구조 속에서 비교와 차별에 맞서야 한다.
한 부모 가정에서는 빈자리를 채워야 하는 것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의젓하게 자라야 한다.
‌그 밖에 다양한 케이스의 가족형태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신의 인생보다 자식의 삶을 위해 살아간다.
부모의 희생을 보며 자란 자식의 마음 한구석에는 알게 모르게 죄의식이 심어져 자신의 삶을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부모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부모 또한 자식이 커가는 과정 안에서 곁눈질로 눈치를 살피게 된다.
온전히 원하는 나의 삶과 부모님이 기대하는 삶. 어떤 선택을 하던 가정이 무너지지 않겠지만, 선택의 길에 놓인 순간부터 행선지를 잃은 채 매일 내 감정을 부수어 내며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위치에 놓인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를 마주하며 삼켜버린 말들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별것 아닌 일에서 시작해 별의별 일로 끝나는 사소한 다툼, 심상한 분노와 흥분, 폭발 등 다양한 상황으로 치닫는 가족 구성원들의 모습에서 삼켜진 말들을 수집하여 재구성해 설치와 드로잉으로 선보이고자 한다.

 “자신의 감정을 가장 순수하게 드러낼 수 있는 상대는 가족이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을 가장 순수하게 드러내기 어려운 상대도 가족이다.

나를,
서로를
가장 잘 알지만
어쩌면 가장 모르는
그 이름은 가족.”


[작가노트-2018]

기억은 언제나 나를 기만한다. 

아는 단어가 새삼 낯설게 느껴지는 기억의 균열, 초면인 줄 알았던 사람이 구면임을 깨닫는 기억의 소환, 감정 이입을 하며 읽었던 문장에 대한 기억의 실종과 도단, 그로 인해 오는 기억의 침략과 불안, 생생하고 낱낱이 모든 것을 기억하려 할수록 
나를 그리고 당신을 상실한다. 

기억은 나를 넘어선다.   

나는 일상생활에서 발설하지 못하고 삼켜버린 말들에 표정을 담아 회화, 설치 드로잉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은 학습된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며, 프레임에서 벗어난 새로운 잣대를 거부하며 타인과 같지 않으면 고독하다고 느낀다. 
거리의 표정 없는 사람들은 하얀 모니터 앞에서 당신을 제약하고 있으며, 당신은 자신의 감정, 자신의 생각을 자기 고유의 것으로 경험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삼켜진 나라”라는 가상의 세계를 통해 언어의 자유를 구현하고자 한다. 

내가 발설하는 언어들은 나의 감정과 항상 어긋나는 지점이 있었다. 
발설한 언어로 나타난 그림의 표정은 과거의 것이 되어 버려 온전하지 않게 되었고 나는 불안을 느낀다. 불안은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지 못해서가 아닌, 언어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 자체에 대한 불안이다.  

언어의 자유는 타인과의 분열과 불균형에서 시작한다. 

나는 이미 익숙해진, 싸늘하게 솟구친 소외감과 싸운다. 
현실에서 생성된 다양한 상실감이 모여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지만, 나의 발은 이곳, 현실에 붙어 있다. 
현실에서 가상 세계를 바라볼 때 생성되는 또 다른 상실감. 이러한 이중의 상실감은 현실 세계를 더욱 뚜렷이 경험하게 한다. 

삼켜진 나라는 언어의 자유를 꿈꾸는 가상의 나라이면서 현실의 이면을 재현하고자 한 나라이기도 하다.  

시대의 소음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소음으로 당신 안에 존재하고 있던 고유의 기억과 순수한 상상의 통로가 막혔다. 내 안에 있는 기억과 말이 강하고, 
순수하며, 
무엇보다 진실되다면 익사하고 있는 당신의 기억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이라 믿는다. 


[Artist note]

Memory always deceives me.

Memory ruptures when a familiar word feels uncanny all of a sudden, and memory is recalled the moment one realizes that someone they’ve met is actually someone they know. Memory of a deep empathetic sentence is lost and disappeared, followed by a sense of the invasion and anxiety of memory. The more I try to remember every single memory clearly, the more I lose myself and you.

Memory transcends myself.

I imbue expressions to swallowed words that haven’t been expressed in daily life, conveying them in paintings and installation drawings.

I believe that we live in a society which respects the freedom and diversity of expression. However, most people fear deviating from the learned frame, rejecting any new standards outside of the structure, feeling isolated when they’re different from others. The expressionless people on the streets constrict you in front of the white monitor, and you no longer experience your feelings and thoughts as your own.

I attempt to portray the freedom of language through the imaginary world called “Swallowed Nation”.  The languages that I spoke have always been inconsistent with my feelings. The expression of the paintings appeared in the spoken language and become something of the past, incomplete, and from this, I feel anxiety. Anxiety is not because language is not freely used, but comes from the condition itself of not being free from language.

Freedom of language begins from rupture and imbalance with others. I battle the cold soaring walls of alienation which I have already grown accustomed to. I dream of a free world embracing the various feelings of loss generated in reality, but my feet are attached to the very ground, here and now. Another sense of loss is produced when looking at an imaginary world from reality. Such dual aspect of loss makes us experience the real world in an even clearer way. The swallowed nation is an imaginary state which dreams of the freedom of language, as well as a site that represents the other side of reality.

The noise of the times is inevitable This noise blocked the passage of pure memory and imagination within you.  I believe that if the memories and words in me are strong, pure, and above all, true, they will open a new horizon for your drowning memories.

[2018] -영문 두산갤러리 제공 




[작업노트 - 2017]



"혼(魂)잣말"


나의 작업은 타인과의 대화 중 발설하지 못하고 삼켜버린 말들에 표정을 담아 그리는 것이다.
한 공간에서 같은 주제로 대화를 하더라도 서로 다른 생각과 감정이 생성되는 지점에 주목하고 이 과정에서 ‘삼켜진 말’은 소멸되지 않고 기억과 감정이 뒤섞인 하나의 혼(魂)이 되어 대기 중에 부유한다는 가설을 세운 채, 대상을 바라본다.

“삼켜진 말들은 긍정적인 면보다 어두운 이면을 가진 말들이 대부분이다.”

타인과의 관계 맺음에 있어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들은 밖으로 비치지 않았을 뿐이지 그 수는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문제점을 안고 살아가거나 방치한 채 살아가고 있다.
나 또한 이런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며 끝내 해결점을 찾지 못한 채 무리에서 어설프게 걸쳐진 존재로 살아왔고 공동체 관계가 짐 지우는 무언의 폭력 속에서 나의 의지, 생각, 행동들을 습관적으로 억눌러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남들과는 다른 감정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스스로 정해놓은 틀 안에 자신을 가두어 버렸으며 이러한 심리적 방어기제를 통해 안정감을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틀 안에서 지속적으로 타인의 생각과 외부 상황을 관찰하게 되었고 이러한 관찰 행위는 단순히 그럴 것이라는 매우 주관적이면서도 추상적인 관점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통한 재구성된 허상이란 것을 스스로가 인식하고 있으며, 이러한 행위가 측정 불가한 느낌적인 느낌이지만 자신에겐 침묵해온 감정을 발산할 수 있는 장치가 되었다.

작업마다 나오는 속박된 형상들은 삼켜진 말들의 이면이다.

삼켜진 말들은 각각의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어 그에 맞는 배경이나 상황, 형상 등의 이미지를 수집하여 구성하였고 만들어진 가상의 공간 안에 양가적 감정의 속성의 면면을 드러내고자 했으며 무의미한 것들이 쌓이고 이내 부서져 버리는 느낌을 내기 위해 지우고 그리는 과정을 반복해 얇게 쌓듯이 작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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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노트 -2014]

나의 작업은 만질 수 없는 풍경과 무질서하게 흩어진 기억의 드로잉이다. 
무의식 중에 쫓은 이미지들을 모아 즉흥적으로 나열하기도 하며,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을 추적해 상징적으로 풀어내기도 한다. 
생경하거나 날것의 느낌을 담아내기 위해 흔히 쓰지 않는 재료를 이용해 꾸준히 실험 중이며,  그간 해왔던 개인적 이야기들을 일방적으로 표출한 작업에서 더 나아가 감상자와 감정을 교류할 수 있는 작업으로 발전시켜 나아가려 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를 졸업하였고(2008), 현재 동대학원에 재학중이다. 
2008년 동덕아트갤러리, 미술의 향방展을 시작으로 16회 이상의 단체전에 참가했으며, '별일 아니다(2014년_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외 총 2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2012년 스토리아트 레지던시 1기와 2013년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7기(장기)로 입주했으며, 2014년 소마미술관 아카이브 등록, 2015년 포트폴리오박람회에서 우수작가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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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work consists of drawing intangible landscapes within murky, scattered memories. I follow my subconsciousness to collect images I encounter both within and outside myself. I express whatever images and memories repeat themselves in my mind. To capture the unfamiliar and the raw, I use uncommon art materials and experiment relentlessly. Whereas previously, my work has been a purely personal endeavor and an act of personal expression, I now wish to evolve and develop an engagement–an exchange of emotions and ideas between myself and the audience.

Received her undergraduate degree in Fine Arts at the School of Visual Arts of the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Arts(2008), and is currently pursuing a graduate degree at the same institution. Participated in more than 16 group exhibitions since her first exhibition, "Direction of Art” in 2008 held at Gallery Dongduk Art. Also, held two solo exhibitions including “Nothing Happens” at Cheongju Art Studio in 2014. Won and moved into the Story Art's residency in 2012 as their pioneer class and long term residency at the Cheongju Art Studio in 2013 as their 7the class. Chosen to be named on the SOMA Drawing Center Archive in 2014 and slected as the Outstaniding Artist at the Seoul Art Foundation in 2015